지금은 새벽 4시.
한참 자야 할 시간이지만 아직 잠들지 못했다.
담배 하나를 태울 겸 창문을 여니 수 많은 귀뚜라미들의 합창과 함께 어두컴컴한 밤하늘 저 너머 목탁 소리가 들려 온다.
소솔한 새벽 바람과 함께 어슴프레 드리워진 관악산의 그림자.
찌르르 울어대는 귀뚜라미들. 그리고 어느 스님의 목탁소리.
모든 것이 애잔하면서 또 밤의 운치를 더 한다.
문득 일전에 본 게시물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제목만이지만.
보는(見) 것과 보는(觀) 것.
견은 눈으로 보는 것이고, 관은 마음으로 보는 것이겠지.
보는 것은 단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고
관은 관조하는 것을 뜻하는 것일 테지.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난 여기서 또 한 번 뒤집어 본다.
보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설 익은 선입견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관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심상의 작용이기에
때로 상대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선입관을 갖게 되지는 않을 지.
종종 라이프에 개설 된 채팅방에 들어 가곤 한다.
예전 젊었을 때와는 달리, 이제는 어느 정도 문자로 대화하는 법을 알게 된지라 말하고 끊는 것이 예전보단 자유롭다.
그땐 나이만 먹고 철은 아직 덜 들었을 때라, 무조건 방을 주도하고, 대화를 주도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선선히 주도권을 내 주고, 가만히 관찰하고 눈으로 기울인다.
다만, 너무 조용하거나, 너무 지루하다 싶을 땐, 체면을 버리고 이모티콘을 동원 해 온갖 익살스러운 짓을 하곤 한다.
예를 들어 ~('' ~)))) 라든지, ('') (: ) (..) ( :) 데구르르르~!
이런 식이다.
현실의 나 답지 못한 '짓'이랄까?
어쨌건, 채팅을 하게 되면 보지 않더라도 자연 보이게 된다.
어찌 그렇지 않을까? 사람은 말을 통해 자신의 정보를 전하는 것을.
특히나 다양한 일과 경험을 통해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상대해 온 터라, 굳이 노려보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직관적으로 다가 온다.
아주 사소한 단편적인 말로도 그 사람의 상대의 성격, 성향, 고민, 기타등등에 대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고, 아는체 하지 않는다.
요즘 내가 깨닫는 것은 어쩌면 내가 느낀 그것들은 그 동안 내 경험에서 둘러쳐진 섭입관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때론 아무런 관(觀)없이 단지 견(見)만으로도 좋지 않을까?
굳이 상대를 재고, 판단하고, 단정 짓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을까?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바라보는 눈도 지니지 못했으면서, 어찌 상대를 섯불리 알았다! 라고 한단 말인가?
새삼 나의 부족함을 깨닫게 된다.
먼저 올바르게 보고, 그 뒤에 봐도 늦지 않으리라.
비슷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견과 관의 발전형은 명상과 사색이 되겠다.
명상은 자기 자신을 관하는 것일테고, 사색은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것일테지.
많은 이들이 명상을 권하지만, 명상만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명상에 앞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지 않는다면, 명상은 단지 시간을 죽이는 무의미한 시간 밖에 되지 않는다.
온갖 번잡한 생각들이 쉼없이 떠오를 텐데, 어떻게 자기 자신을 관(觀)할 수 있을까!
명상도 좋지만, 때로는 사색에 잠김도 좋을 듯 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사색에만 잠겨 잇어서는 안되겠지.
무릇 새는 날개가 돋으면 둥지를 떠나야 하고,
짐승은 스스로 먹이를 잡을 줄 알면 어미 곁을 떠나야 하는 법이다.
사색으로 생각을 정리한 다음,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못한다면
그 많은 사색은 대체 어디다 쓸 것인가?
다시 앞서 돌아가 견과 관도 마찬가지.
견을 했으면 머무르지 말고 관도 할 줄 알아야 하겠지.
- 2009. 09. 04 사이퍼